[안내]7월 봉행될 민간인 피학살 추모위령제 안내

일반
작성자
범국민위
작성일
2004-07-01 20:00
조회
4392

안녕하세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입니다.

7월 봉행될 민간인 피학살자 추모 위령제 안내합니다.





1. 대전산내학살 위령제



제 5회 대전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가 7월 4일 오전 10시부터 '조속한 입법과 철저한 진상규명'을 모토로 산내학살지에서 진행됩니다.



<<행사개요>>



- 일 시 : 2004. 7. 4일(일) 오전 10시˜12시

- 장 소 : 대전역광장(장소 변경됨)

- 주 최 : 대전산내학살 대책회의 희생자 위령제 준비위원회

- 주 관 : 제주4.3유가족/여순사건유가족모임/대전형무소희생자 유가족

대전산내학살 대책회의/대전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대전충남본부

- 후 원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대전광역시청

대전광역시의회, 동구청, 동구의회, 민족놀이패 우금치

- 식 순

0 개회선언

0 산내학살 희생자 영령 묵념

0 진행경과보고

0 추 념 사 / 박병호 동구청장, 김원웅 국회의원

0 추 도 / 유족대표

0 위령 공연 및 헌화(민족예술단 '우금치')



<<대전 산내학살이란?>>

1950년 7월, 대전형무소에는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 정치범들로포화상태였다. 정원이 1200명이었으나 3배가 넘는 3-4000명이 수감되어 있었던 것으로 당시 간수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수형인들의 대부분은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자, 전쟁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이었다.



1950년 7월 6, 7일 양일에 걸쳐 명적계를 보고 분류된 수형인 중 사상범들은 8-10일 사흘에 걸쳐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로 끌려가 미군과 사회 유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원 학살당하였다.



그러나 학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형무소 관계자들이 3일간 수형인들을 끌고나갔다고 증언하는 것과 달리 현장 총살집행자 등 관련자들은 학살이 총 10일간 진행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주변에 살던 주민들도 열흘간 학살이 진행되었다는 동일한 증언을 하고 있다. 이는 수형인 학살 이후, 대전 지역의 보도연맹원과 좌익 관련 활동 전력이 있는 이들을 예비검속하여 모두 학살하였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즉 형무소 사상범 외에도 군경이 후퇴를 시작한 7월 14일~16일 막판까지 골령골에서는 학살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된 수는 해제된 미군문서에서는 여순사건 관련자 1200명, 제주4.3사건 관련자 300명 등 총 1800명이라고 하고 있으나 3000명 이상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앨런 위닝턴 등 외신기사는 7000-8000명이 학살된 것을 보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2. 경산 코발트 학살 위령제



7월 4일 경산코발트 학살 현장에서 제5회 경산코발트 학살 위령제 봉행합니다. 이번회에는 6개 종단에서 합동으로 추모제를 올려주시기로 하였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일시 : 2004년 7월 4일 일요일 오후 2시

- 장소 : 경산 코발트 학살 현장

- 문의 : 이태준 경산유족회 회장 (018-516-7007)



<<경산 코발트 학살이란?>>

1950년 7-8월에 경북 경산의 코발트폐광에서는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다. 경산시 평산동 산42-1번지 일대 폐광산 수직갱도와 인근골짜기에서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경산, 청도 지역의 보도연맹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다. 당시 목격자들은 하루에 열 대 정도의 트럭에 사람들이 실려왔으며 이런 상황이 열흘간 진행되었다고 한다. 또 경산경찰서에 근무했던 이가 임종 직전에 경산 코발트에서 3500명이 죽었다는 증언을 자식들에게 남긴 점도 3500명 학살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당시 대구형무소 수형인들은 포승줄에 묶여 군용트럭에 실려왔으며 수직갱도 입구에 세워져 총살되어가 산 채로 수장되기도 했다. 또 예리한 흉기로 가격당하거나 기름에 태워져 학살당하기도 했다.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서에서 인근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다시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와 학살당했다. 이들에 대한 학살 방법도 앞서 기술한 것과 같이 잔학무도한 것이었다.





3. 익산역 미폭 사건 위령제



- 일시 : 2004년 7월 11일 오후 2시

- 장소 : 익산역 광장

- 문의 : 이창근 회장님 011-672-6496



<<익산역 미폭 사건이란?>>

1950년 7월 11일 당시 기관차사무소에서 전시 비상 상황에 대한 교양교육을 받고 휴식을 하고있던 기관사들은 비행기에 성조기가 그려진 것을 확인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아군임을 알렸다. 하지만, 미군기(B29 전폭기) 2대가 이리역(현재 익산역) 기관차사무소, 송학동 민가, 평화동 호남선철길과 변전소(현 터미널 뒤) 사이에 약 10분 동안 수백 발의 폭격을가했다. 당시 이리 시민들은 전쟁이 터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며 피난 가는 사람 하나 없이 평화롭게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폭격 당일 이리시내에는 우시장이 열려 김제, 황등, 전주, 군산등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소집영장을 받은 이들이 군입대를 위해 이리역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날 폭격으로 인하여 이리역 구내에서만 84명이 사망(이리역 근무자 54명 이상이 몰살)하였고, 송학동 가옥 50채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가옥 폭격시 사망한 사람과 변전소 부근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까지 합하면 그 수는 3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또 7월 15일에도 평화동 변전소와 철길 주변과 마을은 미공군기의 기관총탄 세례를 받았다.





4. 충북 영동 노근리학살 위령제



- 일시 : 2004년 7월 26일 10시 30분

- 장소 : 노근리 쌍굴다리 학살현장

- 문의 : 정구도 대변인 019-643-3192



<<노근리학살이란?>>

노근리 학살은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3일간 진행되어 노인과 어린이를 비롯해서 400여명이 학살되었다. 노근리사건은 1999년 9월 미국의 2건의 비밀 문서와 당시 학살에 참가했던 군인의 증언을 토대로 AP통신에 의해 공개된 후 전세계에 알려졌다. 지난 1950년 미군은 당시 피난을 가던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를 시켜주겠다며 끌고 가다가 무전기로 군용기를 호출해서 무참히 폭격을 가해 죽이고 주민들을 굴다리 안에 몰아넣고는 기관총 사격을 가해 학살한 것이다.



당시 학살 만행에 직접 참가했던 미군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은 당시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중위였던 퇴역 대령 로버트 앤 캐롤은 제7기갑 연대 소총수들이 근처의 진지들로부터 민간인을 사살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이 사건은 우리가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그 누구도 통과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에 있은 일이다. 한 사람도 전선을 넘어 오지 못하게 하라. 전선을 넘어 오려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사격하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한편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해 당시 3일간의 끔찍했던 상황을 알 수 있다. 당시 열 여섯 살이었던 정구식씨는 AP 통신 기자에게 '미군 비행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폭탄을 떨어트린 후 기총사격을 해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죽었다. 그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떨어졌는데 나중에 보니 어린이의 목이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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