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을 건드린 '죄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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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1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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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태재준 동지에게,



며칠 전에는 유럽의 장광열 동지의 편지에 답하고, 어제는 모스크바에 있는 유라시아 님의 글을 읽고, 오늘은 태재준 동지의 편지에 답하려니 과연 인터넷이란 물건이 신기하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그런데 아무리 교통과 통신의 수단이 좋아졌지만 사람은 아직 각자 어떤 지역에 <살고> 있나 봅니다. 물론 그 지역들이 쉽게 연결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마음을 열고 상대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할 때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남한이라는 특수한 역사와 사회문화적 조건을 가진 나라, 진보정당이 뿌리내리기 참으로 어려운 나라에 갓 만들어지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지구당 위원장이고 당간부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당의 이롭고 좋은 모습, 이쁜 모습을 <남한의> 근로대중에게 알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남한의 근로 대중들에게 바로 그들이 원하는 진보정당이 민주노동당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그들의 사랑을 받아낼 것인가를 밤낮없이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남한의 근로대중에게 민주노동당이 내놓은 공약들은 주로 현실성이 없다고 공격을 받습니다. 물론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 그래도, 설사 당장은 현실성이 없더라도 그런 주장을 떠드는 당이 있어야 무언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고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 말은 좋지만 이 기본이 안되어 있는 나라에서 그런 좋은 말들이 실현될 리는 없다 "고 냉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로서 내놓은 홍보물에 "(주대환은) 영국노동당, 독일사민당 같은 진보정당을 만들고 스웨덴 같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썼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왜 하필 영국노동당을 들먹였겠습니까? 당내의 이른바 좌파 동지들은 주대환의 사상이 토니 블레어류의 맛간 사회민주주의(우파)라서 그랬을거라고 단정지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당 이름이 민주노동당이기 때문에 영국노동당을 먼저 들먹인 것이고 이어서 독일사민당을 거론한 것입니다. 물론 독일사민당에서 그친 것은 '카피'가 길어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권자들의 반응입니다. 과연 남한의 유권자들은 " 왜 하필이면 재수없게 정통 사회민주주의 노선에서 이탈하고 있는 당들만 들먹이는거야? " 이렇게 반응했을까요?



아닙니다. " 아, 민주노동당, 혹시나 조선로동당 비슷한 노선을 가지지나 않았나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고 유럽 선진국 진보정당 같은 것을 남한에 만들어보겠다고 진성당원 모아서 그렇게 고생하는구나, 민주노동당이 어느 정도 성공하기만 하면 이 개판인 한국 정치도 바뀔텐데, 진정한 정치개혁이 이루어질텐데, 민주노동당 잘 되어야 할텐데..." 이런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남한의 보수정당들과 영국노동당을 비교하지 영국노동당을 스웨덴사민당과 비교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더욱 영국노동당과 어디에 존재하는지 잘 모르는 이상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과 비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주대환이가) 스웨덴 같은 나라를 만들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겠습니까? " 허 참 그 사람, 스웨덴이라니 꿈같은 이야기지. 이 망할 놈의 나라를 스웨덴 같은 나라로 만든다고? 하기야 꿈이란 좋은거지. 그러니까 부유세 걷고 무상의료, 무상교육 실시하자는 민주노동당 공약이 말하자면 스웨덴 같은 나라를 만들어보자는 얘기라는거지? " 이런 호의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결코 " 무슨 사회민주주의 체제,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런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얼핏 들으면 장광열 동지와 태재준 동지는 정반대의 주문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동지들의 좋은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자유롭지 못합니다. 장광열 동지는 " 사회민주주의 너무 강조하지 말고 좌파들을 모두 단결시켜서 선거에서 이겨라" 하는 주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저가 사회민주주의 많이 고집스럽게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남한이라는 현실이 요구하는 만큼만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좌파의 동지들은 그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깨트렸다는 데 대하여 저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장광열 동지의 애정어린 충고를 진지하게 고려할 용의가 있음을 이미 밝혔습니다.



그러나 저가 만약 사회민주주의에 만족하지 못하는(30대 초반의 젊은) 좌파라면, 제4인터내셔널이든, 신좌파든, 어떤 혁명적 맑스-레닌주의자든,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 우리의 원대한 전망은 원래부터 결코 이런 민주노동당같은 사회민주주의적 공당(official party)의 의회주의적 실천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나라에는 대중적 뿌리를 가진 사회민주당도 하나 없다. 그래서 저런 사람들, 이미 나이 오십이 넘은 주대환 같은 사람들, 자신의 사명을 남한 땅에 진보정당 하나 뿌리내리는 것으로 한정지은 사람들을 도와주어야지, 그리고 그들을 넘어서 우리가 나아가는거야. "



그래서 정책위의장 선거의 선택 기준도 누가 더 남한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고 누가 더 남한의 현실과 남한의 근로대중의 생활이 요구하는 정책에다 당의 부족한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집중할 것인가, 누가 더 그런 정책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개발해내는 데 유능한가 등으로 할 것입니다. 누가 더 많은 전문가들과 연구자들과 원활하게 대화하고 진보의 정책 네트워크를 광범하게 엮어 나갈 것인가를 기준으로 할 것입니다. 누가 더 시시콜콜한 문제들, 근로대중의 생활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소소한 정책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더 유능할 것인가를 기준으로 할 것입니다.



태재준 동지는 북한관 논쟁을 저가 하고 싶어서 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책위의장 후보검증토론회 그 대목 한번 들어보십시오. 저는 대중의 상식 선에서 수수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가 대중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들은 말들을 그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용대 후보의 대답이 기대하던 바와는 전혀 달리 나오면서 쟁점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감히 <성역>을 건드린 '죄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현실, 직접 경험하지 않고 생각해서는 잘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현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보정당의 출현. 남한의 사회경제적 현실은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의 정치문화적 현실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민주노동당 당간부들의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간혹 대변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가 간혹 질질 짜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단지 저 개인의 고통만을 호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동지는 내가 과거의 '명성'으로 결선투표에 올랐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큰 명성도 없거니와 어느 쪽의 셋팅 명단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론에서 저를 이른바 '범좌파'의 후보라고 지칭했던 만큼은 범좌파의 전폭적인 조직적 지원도 받지 못햇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당에 열성적인 활동가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나름대로의 <대중성> 비슷한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결선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많은 동지들이 도와주셨지만....



태재준 동지는 나보고 좌우파의 공격에 신경쓰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주문하십니다. 저는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고 있는 일은 당의 현실에 규정받는 당내 선거입니다. 당내에는 보셨다시피 좌우파의 조직표가 결과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가 정책위의장에 당선된다면 저는 그 순간에 무언가를 꿀꺽 삼키듯 저에게 쏟아졌던 모든 비판을 다 수용하면서도 결코 그에 얽매이지 않고, 다 잊어버리고 직무에 충실하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공부할 것이고 추상이론의 세계에서 구체현실의 세계로 올라갈 것입니다. 동지의 말씀처럼 " 과거에 더이상 얽매이지 말고, 낙관적으로 앞으로 앞으로 달려 "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동지가 많다고 했던 민족주의적 정서를 가진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의 사람들, 과거에 학생운동했던, 그러면서 사회생활을 경험한 분들만이 아니라 사실은 민주노총의 조합원 중에서도 가장 다수가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에 힘입어 출범한 것이 바로 민주노총의 현 집행부입니다. 저(와 허영구 후보)는 사실은 1차투표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이면서 민주노동당 당원인 분들의 지지를 골고루 받았습니다. 일부 언론의 도식적 보도와는 달리... 저가 표의 수치에 연연하지 않고 행복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차 투표에서의 저의 고전은 한편으로는 허영구 후보의 훌륭함에서 오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지가 지적하신 저의 포지션의 분명치 못함에서 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저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의 선거운동이 다수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부응하지 못함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셋팅 후보들의 합동 네가티브 선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엉뚱하게 저는 반통일주의자로 몰렸습니다. 저가 억울하게 생각하는 지점입니다.



저는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정서를 남한 노동자계급의 소박한 정서의 하나로 인정하고 이런 정서를 진보정당이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평소의 실천에서 저는 민족주의적 정서를 가진 동지들과 매우 친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안타까이 저가 그 동지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만큼은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바꾸면 그 동지들 특유의 <대중노선>으로 민주노동당에 좋은 인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태재준 동지가 이야기한 그 많은 민족주의적 정서를 가진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사람들에게 저가 아쉬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보다 세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더 가까운 그 분들이 왜 나서서 현실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관념적 북한관을 지적 비판해주지 않는 것입니까? 왜 포기하고 말았습니까? 포기당한 자들이 민주노동당을 마지막 은신처로 알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저가 또 당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안할 말 못할 말 다 하면서 격론을 주고 받아야 합니까? 예전의 동지들은 다 어디갔습니까?



앞으로 나아가는 것, 나아가고 싶습니다. 미래에 대한 낙관이 없었으면 지금까지 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비관합니다. 이런 사람들과 당을 함께 하는 한 전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저를 때때로 절망에 빠트리는 사람들은 좌우의 관념론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자신의 <민족주의>를 고집스럽게도 현대화 (update)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아마 우선은 숫자가 있으니까 서로를 의지하면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들은 점점 대중으로부터 고립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과정이 당에는 해를 끼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 분들이 민주노동당을 농성장으로 삼고 있으면 말입니다.



동지는 걱정이 안됩니까? 미국의 진보정당은 왜 사라졌습니까? 미국의 보수양당제는 왜 깨어지지 않습니까? 냉정하게 말해서, 객관조건으로만 볼 때 남한의 정치체제는 유럽식 보혁구도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까, 미국식 보수양당제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까? 지금 민주노동당은 촉을 얻은 유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하를 통일하기까지는 앞으로 너무나 멀리 험한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지금 잘해야 합니다. 동지는 민주노동당이 정권을 잡아 통일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멀리서 보내주신 동지애에 깊이 감사드리며, 건투를 빕니다.



2004.6.15 주대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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