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의 천사들, 체제에 도전하다.

일반
작성자
허영구
작성일
2004-06-11 10:00
조회
3003
백의의 천사들, 체제에 도전하다.



보건의료노조가 금년도 민주노총 임단투의 선봉에 섰다. 노조는 사용자단체인 병원협회에 산별기본협약체결, 의료공공성 강화, 주5일제 시행에 따른 인력 충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임금 10.7%인상 5가지를 제시했다. 물론 교섭은 결렬되었다. 그리고 6.10새벽 파업에 돌입했다. 아마도 병원협회로서는 노조의 요구에 근접하는 임금인상은 몰라도 도저히 나머지 4가지는 들어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산별기본 협약을 수용하면 노조의 집단적 힘이 협약에 기초하여 합법적으로 발휘된다. 그러면 사용자들은 개별 병원단위로 대응하던 노사간 힘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둘째, 의료공공성 강화는 현재 한국의 의료체제가 그나마 남아 있는 공공의료기관 조차도 민간의료, 정확하게는 사기업인 의료자본에 넘기고 있는 실정에서 오히려 공공의료 전환이라는 것은 현재의 병원협회를 해체하라는 요구와 같다. 셋째, 주5일 시행에 따른 인력충원 요구는 새로운 인건비부담이 발생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365일 운영되는 병원의 특성상 병원자체가 주5일은 불가능하고 병원노동자 개인이 주5일 근무를 하려면 반드시 인력충원이 되어야 한다. 인력충원을 하거나 기존 노동자들에게 추가로 4시간 분에 대한 초과근로수당을 지급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양보가 필요하다. 넷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노동시장유연화라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역행한다. 비정규직은 노동자내부를 차별화하여 단결을 억제하고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한 것이다. 의료자본 역시 자본인 한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데 이윤의 원천은 잉여노동력의 착취다. 따라서 오늘날 노동유연화의 핵심인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는 것은 의료자본을 철폐하라는 것과 같다.



지금 보건의료노조의 요구와 파업은 병원협회 즉, 병원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자본계급에 대한 심대한 도전이다. 지금 한국의 병원들을 거의 90%넘게 민간의료기관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이를 되돌리려 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병리현상은 매우 심각하여 사람들의 심신을 매우 아프게 하고 이들을 병원으로 몰려들게 만든다. 무한한 의료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병원자본은 과잉진료와 과잉치료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한다. 특히 사립대병원의 경우 병원의 수입극대화는 사립대학운영의 핵심관건이므로 공공성 강화는 이것과 정면에서 배치되는 요구다.



사실 보건의료노동자들이 병원의 수입극대화에 적극 협조하는 노사관계를 유지한다면 주5일제와 관련한 인력충원문제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역시 해결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이 내용을 중심으로 산별기본협약을 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백의의 천사들은 지금 파업중이다. 그러나 그 파업은 병원자본 나아가 의료자본의 입장에서는 전투중이다. 의료의 공공성 강화는 의료자본의 공격에 대한 정면 대응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도전이다.



수가인상을 내걸고 고래고래 외치며 파업하는 한국의 의사와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파업하는 유럽의 의사들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한 인간의 존재는 사회체제적 존재다. 자연적 생로병사에서 아픈 몸이 아니라 체제의 구조적인 사회병이 인간의 심신을 아프게 한다면 이는 병원에서만 치유될 일이 아니다.



고려대 노천극장에 나온 병원노동자들은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집단의 이기주의를 실험하는 것이 아니다. 병원으로 꾸역꾸역 몰려들 수밖에 없는 환자들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해 체제에 도전중이다. 그러나 너무 과격하게 바라보지 말라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체게바라 :여기서 '체'는 '친구'를 뜻함)처럼 총을 들고 썩어 문드러진 사회를 향해 혁명적 전투를 벌이고 있지는 않으니 괜찮을 걸세. 그러나 아름다운 투쟁이지 않은가? 백의의 천사들이 아픈 사회를 치료하기 위해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참 투쟁중인 동지들에게 드리건데 '백의의 천사'는 간호사만을 의미하지 않고 '병원노동자' 전체를 통칭하며 사실 필자는 이에 한 획을 탈락시켜 '백의의 전사'로 부르고 싶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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