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철
교수를 말하노라
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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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철교수,
그는 어떤 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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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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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아는 이들은 거의가 이렇게 말을 한다. 오교수는 해야 할 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고야마는 사람이라고.맞는 말이다. 오교수는 해야 할
말은 실정법의 억압이 제 아무리 드세거나 말거나, 체제의 탄압이 엄청나거나
말거나 곧이 곧대로 말하는 사람이다. 이런 가닥(점) 하나만 가지고도
오교수는 교수자리에나 안주하는 속된 깜냥(선비)이 아니다. 앉아서도
천년 앞을 내다보는 깨친이(학자)라고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말을 하는 혁명적 깨친이의 전형이라고 해도 이에 마주해(대해)서만큼은
거의가 고개를 끄떡일 터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좀 달리하는 사람이다. 내가 보기엔 오교수는 꼭 해야 할
말이라면 목숨을 걸고 하는 학자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개인사적인
이야기 따위는 목숨을 걸고라도 아니 말하는 사람, 이를테면 돌쇠라고
여기고 싶으다 이말이다.
돌쇠라니
무슨 말일까. 돌쇠란 돌이라는 자연적 형체의 인격적 품새다.
비바람에
부대껴도 말이 없고, 눈보라 그 매서운 추위에 쩡쩡 갈라져도 말이 없고,
십년 가뭄 그 불타는 목마름에도 아무 말 없이 제 몸을 짜 한방울 이슬을
맺을 뿐 영 말이 없는 것이 돌이라는 품새다. 따라서 돌쇠란 할 말과
안 할 말을 목숨으로 가르는 이를 이르는 것이니 그렇다면 오교수는
어떤 가닥(점)에서 돌쇠란 말일까. 그와 함께 일을 해보면 안다.
첫째
주머니가 탈탈 빈 것이 뻔히 어림되는데도 죽어도 돈 떨어졌다는 말을
아니 하는 것이 오교수다.
둘째
깡쐬주만 마셔 거의 팽그르 맴쳐(취해) 있는데도 도통 맴친 척을 아니하고
셋째 데데한 제 넉두리 따위는 단 한마디도 아니 하는 사람이 오세철
교수다 이말이다.
요새말로
대학교수 정년이 오년이나 남아 있는데도 35년여를 몸담았던 교문을
마치 옷자락에 먼지를 털드키 툭툭 털고 나오는 데는 기가 막힌 사연이
없을 수가 없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퇴직금으로 빚을 갚고저 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어느 한 벗과 맺은 우정을 지키느라 그리
됐다는 둥, 세속의 날나발(소문)이 어지럽게 휘감건만 오교수는 단 한마디도
아니하고 그냥 그렇게 서있는 돌처럼 굴러가고 있는 것이니 오교수라는
사람됨이란 썅(도대체) 무엇일까.
타고난
과묵의 주인공? 아니다. 그런 말따구나 가지고는 오교수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면 무엇이냐.
돌쇠다
이말이다. 세상이 뒤바뀌고 하늘땅이 온통 뒤집혀도 그냥 돌로 서서
돌의 모습으로 자연을 일구는 돌쇠이지 오교수는 결코 딴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오교수를 찬찬히 볼 것이면 또 다른 구석이 있는데는 다물었던 입을
쩍하니 벌리지 않을 수가 없다. 거나해질 것이면 그가 부르는 노래엔
이런 것이 있다.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애수의
소야곡’이라는 유행가 구절인데 그런 노래를 즐겨 부르는 것을 보면
오교수를 일러 얼핏 헤설픈 감상주의자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택도 없는 수작이다.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이라는 대목을 보잔 말이다. 이 하찮은 가락에
예순을 넘긴 나이테를 실오래기처럼 싣는 것을 보면 오교수는 무엇인가
말 못할 비극이 아니라 분명한 비극이 마치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박혀있다는
갓대(증거)라고 생각된다.
‘가슴에
손을 얹고 / 눈을 감으면 / 애타는 숨결마저 / 싸늘하구나’라는 대목에서
더욱 애절해 지곤 하는 것을 보면 이는 뚜렷해진다.
그렇다고
하면 오교수는 오늘의 잘못된 제국주의 지배 역사를 냉엄하게 갈라치리만치
과학적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 한켠으로는 한갓된 유행가적 퇴폐주의
때문에 갈갈이 찢기운 분열적 인간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걱정 따위는 그야말로 갈데 없는 모함이요, 의도적인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삼류 유행가락에 몸을 싣는 그런 감상의 흐름은 썅(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딱 잘라 말을 하겠다.
한
비극을 넘어 그 비극의 맨 마루인 비장성에 이르는 그의 예술적 여과
과정이라고 믿어 그를 뜬쇠라고 지적하고 싶으다.
뜬쇠란
무엇일까. 뜬쇠란 말 그대로 비극을 잊어버리되 그 비극을 관념적으로
떨구자는 것이 아니다. 비극의 현장 그 역사적 구조를 쓸어안고 그 비극의
한을 풀고저 떠나가는 이라는 뜻이고 보면 아, 우리들의 벗 오세철 교수는
참말로 누구일까. 그대로 원한에 찬 민중의 한을 풀고저 한없이 한없이
떠나가는 민중의 실체 뜬쇠다 이말이다.
입때껏
내 깐엔 나도 오교수를 좀 아는 사람 축에 낑기는 것으로 알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얼마 앞서 어느 신문에 오교수 기사가 난 것을 보고서 나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었다.
기사내용이매,
이참에 35년 동안 몸담았던 교수직을 물러난 다음에는 이 땅에서 끊겨
가고 있는 맑스주의의 맥을 이어 발전시키고저 애를 쓸 것이요, 그러고저
해서는 사회과학대학원을 하나 만들겠다는 대찬 다짐 소리를 읽으며
나는 도리어 가슴이 철렁했다 이말이다. 어째 그랬을까.
첫째
지금 이 땅에서 끊겨 가고 있는 맑스주의 맥을 발전적으로 잇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역사 흐름에 마주한(대한) 정확한 재확인이요,
엄청난 결단이다. 둘째 오늘의 제국주의를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덧씌워
디리대는 요즈음 사태는 참된 하제(내일)의 파괴와 올바른 역사진보의
왜곡이라는 허무주의를 강요하고 있는 꼴이다. 때로는 이념적 막심(폭력)과
아울러 물리적 막심을 마구잡이로 디리대 심정적 꺾임(좌절)과 현실적
파탄을 강제함으로써 이른바 신자유주의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거짓꾸미는
허무주의, 이 막된 판국에 근대 자본주의의 구즈레(모순)를 과학적으로
지적한 맑스의 눈길을 오늘에 발전시키겠다는 오교수의 뜻은 학문적
결단 이상의 뜻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교수는 지금 35년 교수생활 끝에 자그마한 집 한 채도 없이 사글세
집에 사는 처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이 사회과학대학원을
하나 세우겠다고?
여기서
나는 나도 모르게 “오교수는 돌쇠도 아니고 뜬쇠도 아니고 오교수야말로
어먹쇠다.” 라고 외쳐버렸다.
어먹쇠라니
무슨 말일까. 어먹쇠란 양심의 패박(상징)이요, 따라서 위대한 양심이라는
뜻이니 어차피 내친걸음의 오교수여, 한술(한번) 해보시구려. 본디 돌쇠란
끝까지 버티는 끈기밖에 가진 것이 없는 것이요, 뜬쇠 또한 가진 것이라곤
비극을 쓸어안고 그 한을 어기어차 풀러 가는 뜻밖에 가진 것이 없는
것이요, 어먹쇠란 본디 역사란 온갖 구즈레를 뚫고 나아가는 싸움과
애씀(노력) 그 추진력의 패박을 말하는 것이니 오교수여, 우리들의 어먹쇠
오교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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