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논평 2021-16]'참을 수 없는 지배계급의 안이함'

작성자
교육선전실
작성일
2021-11-01 14:08
조회
349

전국교수노동조합에서는 3월부터 격주 월요일 [교수논평]을 발행하여 대학과 교육 현안에 대한 입장표명을 통해 대학민주화와 고등교육 개혁의 주체로서 올바른 교육·대학정책 수립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참을 수 없는 지배계급의 안이함

 

“1907년에 독일에서는 1천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586개의 거대 기업이 생겼는데,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 수는 전체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거의 1/10(138만 명)이었고 전체 증기력과 전력의 거의 1/3(32%)을 그들이 소모했다.”

 

이것은 1917년에 출간된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당시 자본주의의 독점성을 드러내기 위해 제시된 예이다. 이를 100년도 더 지난 옛이야기로 취급할 수만은 없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은 이와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2015년에 대한민국의 15개 전력다소비기업이 사용한 전력량은 74,871GWh였는데, 이는 2015년에 대한민국에서 쓴 전체 전력량인 483,464GWh15%를 넘는다. 물론 15개 전력다소비기업은 대부분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재벌 기업이다. 1위인 현대제철이 2015년에 사용한 전력량은 무려 12,025GWh에 달한다. 이는 전체 전력량의 거의 2.5%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일견 최첨단을 달릴 것처럼 보이는 전자공업이나 반도체 부문 역시 별다를 게 없다. 2위는 삼성전자로 10,042GWh라는 막대한 양의 전력을 소비하였다. 단 두 개의 법인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사용한 전력량의 거의 1/20을 독식한 것이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기후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에너지의 과다한 사용과 그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에 있다면(이것은 현재 과학적 상식에 속한다), 그에 대한 책임을 우선적으로 지어야만 할 자들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전체 전력량의 15%를 독식한 기업 15개에게는 최소한 그에 상응하는 만큼 에너지 사용량과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할 도덕적 책무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소위 탄소중립위원회202185일에 공개한 탄소중립 시나리오초안 세 개에는 2050년까지 산업 부문의 에너지 수요를 2018년 대비 단 1%도 줄이지 않겠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시된 세 개의 초안 모두에서 2018년의 140.2백만toe에서 2050년의 139.3백만toe로 감축한다고 계획되었으며, 따라서 산업 부문에 대해서는 세 개의 초안이 아닌 단 하나의 초안만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당시 공개되었던 시나리오 초안이 얼마나 왜곡된 것이었는지 명백히 알 수 있다. 당시 정부가 내어놓은 자료는 이후 내용을 읽을 가치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최소한의 상식을 벗어난 초안이 공개되자 각계각층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20211018일에 탄소중립위원회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상향안><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안>을 심의 의결하였다. 게다가 <2030 NDC 상향안>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감축하는 것으로 기후위기의 심각성, 국제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나라의 역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상향안을 마련했다고 설명하며 자찬했다. 그러나 뚜껑이 열리자 그렇게 자랑하던 40%라는 수치조차 거의 사기에 가까운 장부 조작의 결과물임이 드러났다. 기준연도인 2018년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배출량만을 따지는 총배출량으로 제시하고, 목표인 2030년 배출량은 배출량과 흡수제거량을 모두 고려하는 순배출량으로 제시하여 수치만 부풀리는 숫자놀음을 한 것이다. 마치 살을 뺀다면서 오늘 먹은 밥 무게를 어제 먹은 밥과 밥그릇을 합친 무게와 비교한 후 밥그릇 무게만큼 감량에 성공했다고 기뻐하는 꼴과 같다. 제 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주장인데, 이에 대해 지적하자 정부가 내어놓은 답은 더욱 걸작이다. “기준 연도를 총배출량으로 잡았다고 해서 목표 연도를 순배출량으로 잡으면 안 된다는 국제적인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명시된 규정만 없으면 그게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는 소리이다그것이 아무리 상식적으로 불합리하더라도.

 

정당한 비판이 쏟아지자, ‘탄소중립위원회의 위원장은 더 높은 목표를 요구하는 분들께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응수했다. ‘탄소중립위원회의 안은 구체적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것은 최소한 조직적이어야 하며 효과적이어야 한다. ‘탄소중립위원회의 안은 장부 조작에 기초하였다는 점에서 이미 내적으로 조직적이지 못하며, 확실히 정량화가 가능한 배출량 감축을 요구하는 대신에 불확실한 흡수제거량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효과적일 수도 없다. 게다가 감축의 상당 부분은 현실화되지 않은, 언제 현실화될지도 확실하지 않은 기술에 의존한다. ‘기술발전의 신앙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이는 효과적이나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종교적이다. 때문에 아무리 많은 자릿수가 적혀 있어도 그 수치는 여전히 추상적인 것으로 남는다. 종잇장 위에 숫자를 몇 자리나 자세히 적어 넣었는지가 구체적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증명되는 것은 다만 스스로가 종잇장 위의 숫자와 물적 현실도 구분 못하는, 관료주의에 물든 지적 사기꾼이라는 사실뿐이다. , 지식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가졌다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에게 양심을 기대하는 것은 분명히 너무나도 과도한 처사이다. 하지만 다시 기후위기로 돌아가 보자. 기후위기는 현실이며, 실제 물리적 현상이다. 종잇장 위에 무슨 수를 적었는지는 이 물리적 현상과 아무런 직접적 관계가 없다. 관계가 있는 것은 오직 실제 물리적으로 감축된 온실가스 배출량일 뿐, ‘탄소중립위원회가 그것을 40%라고 부른다고 그만큼의 물리적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노력의 궁극적 목표는 기후위기에 대한 실질적 대응이 아니었는가? 실질적인, 즉 물리적인 감축이 목표가 아니었는가? 지금 들이닥친 기후위기가 진정으로 위기임을 이해했다면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숫자놀음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다.

 

따라서 간단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는 지배계급이 이를 위기라고 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수많은 과학자들의 경고와 눈앞에서 계속 벌어지는 재난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이 자본주의 사회의 안이한 지배계급은 최소한의 생존 감각조차 상실한 것이다. 지배계급과 그들의 앞잡이인 소위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구체적인 문제의 해결사라고 자처하지만, 기본적인 생존 감각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위기에 대응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이미 양심의 문제를 떠나 순전한 능력의 문제이다.

 

이글턴에 따르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과 달리 그렇게 운이 좋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있다.” 지금 기후위기로 직접 위협을 받는 모든 이들이 바로 후자에 속한다. “자신들의 사회적 존재를 보다 넓은 정치적 틀 안에 설정해야 할 특별히 절박한 이유가 없는 지식인들은 당분간 장부 조작과 모호한 대안, 맹목적 신앙에 안이하게 매달려도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들의 억압적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촉각을 다투며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집단들”(그 중심에 노동자 대중이 있다)단지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해서시급히 자본주의를 끝장내지 않으면 안 된다. ()


20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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