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논평 6] 외국인 교원의 지위와 대학의 공동체성 2020.11.9

작성자
kpu
작성일
2020-11-09 12:00
조회
1411

전국교수노동조합에서는 10월부터 매주 월요일 [교수논평]을 발행하여 대학과 교육 현안에 대한 입장표명을 통해 대학민주화와 고등교육 개혁의 주체로서 올바른 교육·대학정책 수립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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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교원의 지위와 대학의 공동체성


 


라틴어로 대학을 의미하는 ‘universitas’‘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 선생과 학생의 공동체를 뜻하는 것이라 한다. 물론 이 단어가 가리키던 중세적 대학은 이미 소멸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라는 단어가 지금도 여전히 사용된다는 사실은 현재의 대학 역시 이 단어의 근원적 규정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오늘날 국내 대학의 모습은 어떠한가. 선생과 학생 사이의 평등한 관계는 고사하고, 선생이라는 이들 사이의 관계조차 공동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차별과 배제로 얼룩지어 있지 않은가. 전임교원이든 강사든 학생들의 교육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을 터인데, 고등교육법이 최근 개정될 때까지 강사는 제대로 교원 취급을 받지 못했다.


 


전임교원이라고 해서 다 같은 전임교원도 아니다. 소위 정년계열 교원이 있는가 하면, 이른바 비정년계열 교원도 있다. 정년보장을 받을 수 없는 비정년계열 교원은 신분상 불안정 때문에 정년계열 교원보다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정년계열 교원이라고 해서 모두 다 삶이 편한 것은 아니다. 통상적으로 정년계열 교원도 정년보장을 받기 전까지 주기적으로 재임용 평가를 받으며, 그동안 자신의 몸값을 어떻게든지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생존경쟁의 장에서 다른 구성원의 사정 따위 알 바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차별과 배제로 얼룩진 대학의 한구석에 외국인 교원들이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앞서 언급한 비정년계열 교원인데, 심지어 비정년계열 교원 중에서조차 다시 차별을 받는다. 국내 대학의 외국인 교원의 임금 및 복리후생에 관한 통계는 찾기 어렵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예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 사립대학의 규정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비정년전임교원은 교육교수, 외국인교수, 산학협력중점교수로 구성되는데, 그 중 교육교수와 전임 산학교수의 직급은 조교수와 부교수로 하고, 외국인교수의 직급은 조교수로 한다.” 부교수까지 승급할 수 있는 다른 비정년계열 교원과 달리 외국인교수”, 즉 외국인 교원만은 그 직급 상한을 조교수로 제한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외국인 교원의 경력이 다른 교원들에 비해 짧은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사립대학의 경우에는 사실상 외국인 교원인 외국어강의중심교원을 두는데, 이 대학의 직급 획정표에 따르면 외국어강의중심교원은 무려 조교수 14년차(!)까지 승급이 가능하고 부교수로는 승급할 수 없다. 참고로 그 대학의 다른 비정년계열 교원은 조교수 9년차 이후 부교수로 승급하며, 정년계열 교원은 특별히 경력을 인정받지 못한 경우이더라도 6년의 조교수 기간을 마치고 부교수로 승급한다. 정년계열 교원과 비정년계열 교원을 나누는 데에 그치지 않고, 비정년계열 교원 중에서도 차별에 차별을 거듭한다. 이것이 현재 국내 대학의 현실이다.


 


혹자는 외국어강의중심교원에 대해 대우를 달리 하는 것은 외국어강의라는 직무의 특수성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합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법원은 아마도 그렇게 판결할지 모른다. 그러나 외국어강의중심교원은 앞서 예로 들었던 외국인교수와 사실상 동일한 업무에 종사하며, 따라서 이는 직무를 핑계 삼아 외국인을 차별한 것일 뿐이다. 규정의 문구를 악용해서 거기 내포된 본질을 부정하려 요설을 펴는 것이 바로 타락한 싸구려 관념론이다.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이것이 용납되는 현실이야말로 소위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가 대중의 상식적 수준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감수성과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대학은 아카데믹 풀(academic fool)이 고여서 썩어가는 풀(pool)이 아니다.


 


오늘날 대학의 처지는 19세기말 러시아 농업공동체의 처지와 유사하다. 신자유주의라는 특정 형태의 자본주의공동체에 대적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남긴 충고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농업공동체가 가진 약점바로 고립이다.” 이 교훈처럼 공동체로서의 대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립을 넘어선 연대가 필요하며, 연대는 곧 평등한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동료로서의 외국인 교원을 차별하는 배타적 대학에게 미래는 없다. ()


 


 


20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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